‘손위(手上), 손아래(手下)’라는 말에 대하여
언어 예절가로 심취(心醉)해 있는 어떤 분이 ‘손위 동서/윗동서, 손아래 동서/아랫동서’라 하는 친속 지칭어가 써서는 안 될 나쁜 말이라 하였으므로 그 내용을 접한 지인(知人)들이 정말 그러냐고 물었다. 미심쩍어서 검색해 보았더니 역시 같은 내용이었으며, 심지어 ‘손 위에는 손등이 있고, 뒤집은 손의 위쪽은 손바닥’인데, 어찌 친속을 호칭, 지칭하는 데에서 그런 무지한 말을 다 쓸 것이냐며 대갈일성(大喝一聲) 나무라는 투였다.
전혀 그렇지 아니하다. 친속 관계를 표현하면서 ‘손위, 손아래’를 쓰는 역사는 이미 오래되어, ‘조선왕조실록’ 등에서 흔하게 나타난다. 그리고 아주 순정(純正)한 중국 한자어 ‘수하(手下)’를 바탕삼아 고유어로 바꾼 표현이므로 ‘손위, 손아래’라는 말이 속되거나 순화(醇化)되지 못한 것으로 판단할 여지도 없다. 우리 국어 사전 대다수에서 ‘수상(手上), 수하(手下), 손위, 손아래’는 표준어로 되어 있다.
여기에서 ‘손’의 정체 내지 어원(語源)은 ‘농사철, 일철’이면 사람 곧 노동력의 부족을 ‘손이 부족하다’라 하는 등에서 보듯이 신체의 일부분으로서의 ‘손’이 틀림 없을 것 같다. 또 ‘손위’와 ‘손아래’를 한자어로 각각 ‘수상(手上)’, ‘수하(手下)’라고도 하는 것을 보면 ‘손위’와 ‘손아래’의 ‘손’은 신체 일부를 뜻하는 ‘손’의 의미가 확장된 것이 틀림없어 보인다.
‘손위’와 ‘손아래’는 한 단어로 굳어진 것으로 보기 때문에 동일한 의미로는 ‘손 위’나 ‘손 아래’처럼 띄어 쓰지도 아니한다. 만일 띄어 쓴다면 말 그대로 ‘손의 윗부분’, ‘손의 아랫부분’을 뜻하는 구성이 되어버린다.
자기보다 서열이 낮은 동서를 일반적으로 가리키는 표현으로 '손아래 동서'라고 한다. '손아래 동서' 대신에 '아래 동서'라고도 쓴다. 구어(口語)에서는 이제 완전히 단일어(單一語)로 굳어져 '아랫동서, 손아랫동서'로 쓰나 국어사전에서는 아직 그것들을 한 단어로 인정하지 않았으므로 '손아래 동서, 아래 동서'처럼 써야 한다.
이 ‘손위, 손아래’는 위에서 언급한 그대로 중국 한자어 ‘수하(手下)’로부터 비롯하였다. 중국어, 고한어(古漢語)에서 ‘수하’는 ‘부하(部下)’의 뜻이었다. 중문대사전에서 ‘手下’는 “部下也”라 하고 <三國志, 吳志, 太史慈傳注>의 “江表傳曰,先君手下兵,數千餘人,盡在公路”를 예시로 들었다.
위에 보인 중국어, 고한어 ‘수하’를 빌어 우리 선조들은 ‘부하’와는 상관 없는 ‘서열이 낮은 친족원’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하였고, 그 말을 쓰자니 자연스럽게 ‘수상(手上)’을 대칭어로 만들어 쓸 수밖에 없었으며, 그것들을 우리말화하여 ‘손위, 손아래’라 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들이 사용함에 있어 결점이 없는 훌륭한 표준어로 인정하는 데 전혀 문제가 없다. 조선왕조실록에서 ‘수하’를 ‘군부대 조직’ 등의 ‘부하’가 아니고 ‘친속’ 집단 가운데의 낮은 서열을 가리킨 실제를 두 예만 보이면 다음과 같다.
숙종(肅宗) 6년(1680, 경신) 11월 4일 기미
임금이 하교하기를, “역월(易月)하는 제도는 이미 을해년의 옛전례가 있으니, 지금 변경하는 것은 부당하다. 또 두 분 자전(慈殿)께서 손아래 사람의 상에 최복(衰服)을 그대로 입고 계신 것도 미안하다. 영상의 의논대로 시행하되, 대왕대비전 복제는 이미 기한이 지났으니, 편의상 한(漢)나라의 섬칠일(纖七日)하고 탈복(脫服)하던 뜻에 의거하여 7일에 제복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上下敎曰: “易月之制, 已有乙亥舊制, 今不當變改。 兩慈殿於手下之喪, 仍持衰緦, 亦爲未安。 依領相議施行, 而大王大妃殿服制, 今已過期, 姑依漢朝纖七日釋服之義, 七日除之事, 擧行可也。”)
정조 11년(1787, 정미) 3월 15일 계미
조경이 말하기를, “지난번 성교(聖敎)를 받들었는데 말하기를, ‘군하(群下)의 정리(情理)로는 더 나에게 절실한 필요가 없다.’라고 하셨습니다. 신이 물러나와 예문(禮文)을 상고해 보니, 일반 사람의 집에서 손아래(手下)의 상(喪)을 당하면 가장(家長)의 상복(喪服)은 기년(朞年)에 끝나는데, 만약 상인(喪人), 상부(喪婦)가 있으면 3년을 마치도록 궤연(几筵)을 철거하지 않으며, 비록 미천한 비복(婢僕)이라 할지라도 3년상(三年喪) 마치기를 원하면 들어준다고 하였습니다. 이는 비복의 애통해 하는 마음이 가장(家長)들보다 더해서 그런 것은 아니며 다만 그 분의(分義)가 소중하고 도리(道理)가 있음으로 인해서 허락하는 것입니다. 이는 비록 꼭같은 경우의 일은 아니지만 이제 만약 비례(比例)하여 살펴본다면 어리석은 신의 토복(討復)하라는 청은 지극한 정이 미치지 못한 바가 있다고 할 수 있는데 차마 세월만 보낼 수 있겠습니까?” (璥曰: “向奉聖敎, 若曰: ‘群下之情理, 未必更切於予。’ 臣退考禮文, 則人家手下喪, 家長服盡於朞年, 而若有喪人、喪婦, 則終三年不撤凡筵, 雖至婢僕之賤, 願終三年喪, 則聽之。 婢僕哀痛之心, 未必加於家長, 而特因其分義所重, 道理所在而許之。 此雖非襯着之事, 今若比例而觀, 則愚臣討復之請, 其可曰至情之有所不逮, 而忍度時月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