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릉도와 죽도    /     대나무 섬은 오히려 울릉 도였다.

 

  조선시대 학자들이 쓴 문집에 보면 울릉도와 죽도에 대한 다음과 같은 내용들이 있다.

「울릉도는 일명 무릉(武陵), 혹은 우릉(羽陵)이라 한다. 동해에 있으며 울진현과 마주보고 있으며 섬안에는 크고 작은 산이 있다.  지방이 백리이고 뱃편으로 가면 이틀이면 도달한다.
   날씨가 청명하면 봉우리 끝이며 산뿌리를 역역히 볼 수 있다.  지역이 넓고 땅이 비옥하여 대(竹)나무를 산출하므로 해서 죽도(竹島)라고 부르기도 한다.
    세 봉우리가 있어서 삼봉도(三峰島)라고도 하는데 우산(于山), 우릉, 울릉, 무릉, 의죽(礒竹)등의 명칭은 음이 와전된 것으로 본다.」
「땅이 비옥하여 대(竹)가 나무기둥 만큼 굵고 쥐가 고양이만큼 크며 복숭아는 되(升)보다 크다는 말이 있다.  임진왜란 후에 가 본 사람이 있었는데 그 섬도 또한 왜구가 분탕질을 하여 사는 사람이 없었다.  근자에 들으니 왜구들이 의죽도(礒竹島)를 점거해 산다고 하는데 의죽도는 바로 울릉도이다.」
 이 내용에서 보면 울릉도가 한때 대나무가 있는 섬으로 호칭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의죽(礒竹)이라 하면 바위틈에 솟아난 대나무이거나 바위와 어울려 자라있는 대나무들 형태를 보고 붙인 이름이 된다.
 지금 일본은 울릉도가 아닌 독도를 보고 죽도(竹島)라 부르며 자기네 땅이라 우겨댄다.
 독도는 어느 문헌에 봐도 죽도로 호칭된 일은 없었다.  한자(漢字)를 써 온 나라는 대개 지명을  아무런 의미없이 쓰지 않았다.
 조선 광해군때 있었던 기록도 보면 울릉도를 의죽도로 언급한 것을 알게 된다.

「광해 갑인년에 왜(倭)가 배 두척을 보내어 장차 의죽도의 형세를 탐색하겠다며 그 섬이 경상·강원 사이에 있다고 하였다.  조정에서는 그 외람됨을 미워하여 그들을 맞이하지 않았다.  단지 동래부사 박경업에게 이르기를 왜인들이 의죽도를 탐색하려는 것은 무리한 행동인줄 모르지 않을텐데 분수에 맞지 않게 넘어서 살피겠다 하니 이 무슨 심보란 말인가?  이웃나라간 우호의 도리도 아닌 것이다.  이른바 의죽도는 우리나의 울릉도이고 경상도·강원도 양해양에 걸쳐 있다.
   여지승람(輿地勝覽)에도 실려 있는데 어찌 그들한테 속으랴?  대개 신라 · 고려 이래로 토산물을 체취해 왔고 우리 조정에 와서는 누차 죄인들의 도피처가 되고 한 것을 잡아오고 하였거니와 지금 우리 백성들을 안살게 한다고 하여 어찌 남의 나라 사람이 살게 용납하랴.」

대마도의 왜인이 울릉도를 몰래 찾아들고 한일이 많았다.  그들 왜인은 울릉도에서 나는 고기며 대나무를 탐내서 도둑질해가고 하였다.  그러면서 그들은 의죽도 즉, 울릉도를 점령하였다고 하며 후에 자기네 영토라 주장하기도 하였다.

조선 숙종때 대마도 도주(島主)가 동래부사에게 글을 보내어 〈조선인이 일본 의죽도를 침범해 들어 왔으므로 붙잡아 압송한다〉하는 일이 있었다.  이에 조정에서는 적반하장 격인 그들 왜인을 울릉도에 들어오는 것을 엄하게 금지시켰다.  그리고 수시로 무신들을 보내 감시를 하고 단속을 하였다.  이때 안용복(安龍福)이가 그들을 단속하는데 공을 세웠다.

울릉도가 오히려 죽도의 별칭을 가졌던 것을 보면 울릉도가 그들 일본의 영토가 아닌 다음에야 죽도의 명칭과는 하등 관계가 없는 독도를 그들의 영토라 주장 할 수 없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