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목사(晋州牧使)로 부임하시다.

   고려사 열전에 의하면 시조공은 보문각교감(寶文閣校勘) 다음에 전라도안찰사로 나가신것으로 보인다.(高麗史』제 102권, 列傳 15, 金之岱 列傳; 入拜寶文閣校勘 後爲全羅道按察使.)  이에 대해서도 아래와 같은 견해가 있으니 이를 종합하여 보면 진주목사를 하신 시기는 1240년 이전이고 그후 전라도안찰사를 하신 것으로 보인다.

   진주목사는 진주목(晋州牧)을 다스리는 책임관이다. 진주는 현 경남지역을 말하는데 당시 전국적으로 진주목((晋州牧), 충주목(忠州牧), 상주목(尙州牧), 전주목(全州牧)등 8개 목이 있었다. 목사는 안찰사보다 한단계 낮은 관직이다. 품계는 종3품이다. 목(牧)은 도(道) 관할보다 지역이 좁다. 안찰사는 도의 행정을 감무(監務)하고 지방관리를 임명하고 파면하는 권한을 갖고 있다. (김정현(金丁鉉),『영헌공김지대』,도서출판고산자의후예들, 2004, p.16.)

 東文選』제 18권, 七言排律,「寄尙州牧伯崔學士滋」; 去歲江樓餞我行 今年公亦到黃堂.... 洛邑溪山雖洞府, 晉陽風月亦仙鄕....이 시를 보면 김지대(金之岱)가 진주목사로 부임한 것은 최자(崔滋)가 상주목사로 부임한 前 해임을 알 수 있으며, 다음 글에서 볼 수 있듯이 최자가 상주목사로 부임하여 사불산(四佛山)을 심방(尋訪)한 것이 고종 28년(1241년)이었다. 그러므로 김지대(金之岱)의 부임 년도는 적어도 1240년 이전이었다고 생각된다. 天,「遊四佛山記」, 湖山錄』下卷(韓國佛敎全書』제 6권, 동국대출판부, 1984, 206-207쪽); ....高宗 二十八年 越歲在辛丑 少卿崔滋 出守尙州 聞其奇異 試尋訪焉.... (李鍾文,「金之岱의 生涯와 詩世界」(啓明漢文學會,『漢文學硏究』, 제17집, 2003), pp.31-49.)

   경남 진주에는 우리나라 고대 누각중 3대 누각의 하나인 촉석루(矗石樓)가 있다. 이 촉석루의 창건자에 대하여 의견이 분분하나 일반적으로 알려진 바로는 바로 시조공께서 진주목사로 재직시에 건립한 것이다. 아래 기사들을 참고하기 바람.

청도김씨홈페이지 촉석루 소개   엠파스 기사(뉴스)  웹검색자료

32번 : "촉석루 창건자 김지대목사 아니다"
글쓴이: 경남일보 등록: 2002-07-13 17:36:02 조회: 1090
"촉석루 창건자 김지대목사 아니다"

진주 촉석루의 창건자가 현재 기록된 진주목사 김지대보다 100여년 앞선 인물인 진주사록 김준이라는 기록이 나와 촉석루 관련 자료를 재검토해 이를 바로잡아야 할 것으로 지적됐다.
또 이 기록이 사실로 확인될 경우 촉석루 창건 연도도 100년이상 앞당겨지게 됐다.
현재 진주성내 촉석루 안내판에는 촉석루 창건과 관련해 “고려조 고종 28년(1241년) 진주목사 김지대(1190-1266)가 창건한 이후 지금까지 7차에 걸쳐 중수를 하였다”라고 돼 있다.
그러나 최근 본지에서 확인한 바에 따르면 교남지(嶠南誌) 53권 14장 진주관안(晋州官案)조에 촉석루 창건자는 김준(金晙·1057-1124)이라고 명시돼 있다. 이 기록에는“김준은 장원급제를 하고 진주사록으로서 청백리에 뽑혔으며 진주 촉석루를 창건했다”고 되어 있다. 교남지는 1940년 발간된 76권 15책 분량의 향토지로 대구의 정원호라는 사람이 편찬했다.
진주시가 촉석루 창건자로 “고려조 고종 28년(1241년) 진주목사 김지대(1190-1266)” 로 못박은 것은 진주문화원이 펴낸‘진주문화 21호(1995)’ 에 향토사학자 김범수씨가 ‘촉석루 창건내력’ 을 발표한데 따른 것이다.
진주시는 그동안 뚜렷한 근거도 없이 촉석루가“공민왕 14년(1365년) 창건” 됐다며 각종 기록에 이같이 명시해 왔다.
그러나 김씨가 하륜의 촉석루 기문 가운데 ‘始手於金公 而再成於安常軒 皆壯元也’, 즉 장원급제를 한 ‘김공’ 이 촉석루 창건자라는 구절에 근거해 ‘김공’ 이 누구인지 추적하는 과정에서 ‘김공’ 을 고려조 고종 28년(1241년) 진주목사 김지대로 단정한 글을 발표하자 이를 그대로 좇아 각종 기록을 이것으로 바꾸었다.
김범수씨는 이 글에서“고려사 등을 살펴보면 충숙왕 때 이전의 장원 급제자중 김씨 성을 가진 인물가운데 진주목사 경력자는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영헌공실기를 보면 김지대(1190-1266)의 행적중 진주목사를 지냈다는 말이 있고, 또 김지대가 진양에서 상주목사 최자에게 보낸 시가 동문선에 전한다”라고 해 청도 김씨 시조인 김지대 후손들이 발간한 것으로 추정이 되는 영헌공실기(英憲公實記)에 실린 ‘진주목사의 경력’과 ‘장원급제’를 했다는 기록을 근거로 해 촉석루 창건자인 ‘김공’으로 단정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러나 촉석루가 김지대보다 100여년 앞선 인물인 김준이라는 인물이 창건했다는 기록이 나타나면서 촉석루가 고려조 고종 28년(1241년) 진주목사 김지대(1190-1266)가 창건했다는 내용은 충분한 고증을 거쳐 이를 바로 잡아야 할 것으로 보인다.
현재 촉석루가 고려조 고종 28년(1241년) 진주목사 김지대(1190-1266)가 창건했다는 기록은 진주성내 촉석루 안내판 뿐 아니라 진주시사를 비롯한 각종 진주시 공식기록에 그대로 실려 있다.
한편 이에 대해 지역에서는 “국가 사적지 안에 세우는 공식적인 안내판 문구를 제대로 고증을 거치지도 않고 몇몇사람들의 의견을 그대로 수용한 것은 이해가 되지 않는다”며“향토 사학을 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견해를 논문으로 실을 수 있으나, 이를 인용해 사적지내 안내판에 세우는 일은 신중을 기해야 되는데, 정확한 근거도 없이 촉석루 창건에 대해 인용한 것은 행정편의주의에서 비롯된 것”이라며 비판했다.
 
강동욱  기자 <kang at gnnews.co.kr> 
 
경남일보 2002. 7. 6


32번 글의 답장글 : 촉석루 창건자는 김준이 아니다
글쓴이: 경남일보 등록: 2002-07-13 17:31:12 조회: 806
촉석루 창건자는 김준이 아니다

본보 7월 6일자 8면 ‘촉석루 창건자 김지대 목사 아니다’의 기사에 대해 향토사학자 김범수씨가 이의를 제기해왔기에 그대로 게재합니다./편집자 주

경남일보 2002년 7월 6일자 ‘촉석루 창건자 김지대 목사 아니다’의 제하에서, 교남지의 기록을 들어 ‘사록 김준이 창건했다’는 주장은 납득할 수 없기에, 아래와 같이 이의를 제기한다.

교남지는 대구의 정원호가 아닌, 성주의 정원호가 1940년이 아닌 1937년에 만든 사찬이다. 사찬이란 개인이 만든 것을 일컫는다. 그는 촉석루를 ‘사록 김준(1057~1124)이 창건했다’고 하였으나, 김준은 진주목 관아의 말단직인 사록이었기에 그가 촉석루를 창건했다는 주장은 어불성설이다. 하륜(1347~1416)이 말한 장원급제한 김공이 누구인지 진주에도 알려진 적이 없었는데, 성주의 정원호가 어떻게 알았겠는가.

사록(司錄)은 록사(錄事)라고도 하는 정8품이다, 이는 과거에 급제하면 초임으로 보직되는 직위이다. 설혹 사록이 촉석루를 창건했다고 하더라도 그 공은 진주목사에게 있는 것이다. 진주목사는 정3품이자 진주관아의 최 고위직이기 때문이다. 요샛말로 말하면 과장의 공로가 있었다고 하더라도 시장의 업적인 것이다.

그리고 김준은 고려조 진사과(고려시대의 문과)에 급제한 장원자도 아니다. 고려조 과거사적에는 김준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고려사 열전에는 김준은 ‘학문을 좋아하고 글을 잘 지으므로 괴과(魁科)에 뽑혀 진주사록에 보했다’고 하였는데, 괴과란 으뜸으로 뽑혔다는 뜻이지 진사과(문과)에 장원급제하였다는 뜻은 아니다.

정원호는 촉서루 조에서도 촉석루는 ‘여조의 록사 김준이 창건했다. 강 중에 돌이 있어 뾰족 뾰족하여 담암 백문보가 촉석루라고 명명하였다. 뒤에 통판 안 진이 중창하여 장원루라고 개명했다’고 하였으나, 안진(?~1360)은 충숙왕 때의 진주목사이고, 백문보(?~1374)는 공민왕 때의 문신이니, 순서를 바꾸어 왜곡하였다.

또한 교남지의 진주군 조를 보면 이는 진양지를 인용한 것 같으나, 인물 조를 보면 거기에 있는 인물이 많이 생략되어 있고, 없는 인물들이 많이 수록되어 있으며, 특정 문중의 것은 극히 미화되어 있다. 그리고 진주군의 것이 아닌 것도 수록되어 있다. 다른 군의 것도 마찬가지이다. 이런 것이 사찬의 한계인 것이다. 그러므로 학계에서나 향토사학계에서는 교남지의 것은 인용하지 않는다.

예컨대 진주에도 일제시대에 만든 진양지와 비슷한 진양속수라는 것이 있다. 그러나 그 내용을 보면 원근을 가리지 않고 각 문중의 인물들이 많이 수록되어 있고 미화되어 있어, 오늘날 진주의 향토사학계에서는 이를 무시하고 있는 것과 같은 것이다.

거듭 밝히지만 고려조 충숙왕 9년(1322)에 촉석루를 재건한 진주목사 안진 이전의 인물 중 장원급제자로서 김씨 성의 진주목사 경력자는 고종 28년(1241)의 김지대(1190~1266) 뿐이다.

/김범수 향토사연구가

경남일보. 2002. 7. 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