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조공께서
여러 관직에 계실적에 권력자에게 전혀 굴하지 않고 오직 백성을 중히 여겨 공명정대한
선정을 베푼 사례는 여러 역사적인
기록에 보이거니와 특히 전라도안찰사로 재직시의 일화(逸話)는
시조공의 기상을 엿보기에 충분한 것이다.
이 일화(逸話)가
실린 기록(문헌)은 다음과 같다.
●고려사
열전(高麗史 列傳)
●익제(益齊)의
저서(著書) 역옹패설(櫟翁稗說)
익제는
고려 공민왕때 대학자며 문하시중(門下侍中)의 고위관직에 있었던 이제현(李齊賢)의
호(號)이다. 그의 저서
역옹패설(櫟翁稗說)에
김지대에 관한 기록이 있는 것을 보게된다. 역옹패설을 낙옹비설이라고 읽기도 한다.
(김정현(金丁鉉),『청도김씨사』,도서출판고산자의후예들,
2003,
pp.29-30.)
●진도
향토사지(珍島 鄕土史誌)의 기록
(김정현(金丁鉉),『청도김씨사』,도서출판고산자의후예들,
2003,
pp.30-31.)
●여사제강(麗史提綱)
조선
숙종때 유계(兪棨)가 편찬한 여사제강(麗史提綱)이란 책이 있다. 이 책은『고려사』에
의거 편년체(編年體)로 엮은 역사책이다.
이 책에는 거유(巨儒) 송시열(宋時烈)의 서문(序文)도 있다. 내용을 보면 김지대(金之岱)에
관계된 말이 있다. 그 책의 권지십삼(券之十三)
즉 13권에 고종기하(高宗紀下)에 있는 것이다.
(김정현(金丁鉉),『청도김씨사』,도서출판고산자의후예들,
2003,
pp.32-33.)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고려사절요는
조선조 세종때 명신(名臣) 김종서(金宗瑞)를 위시하여 편찬된 역사서이다.
(김정현(金丁鉉),『청도김씨사』,도서출판고산자의후예들,
2003,
pp.34-35.)
●동국사략(東國史略)
동국사략은
조선조 태종때 학자이며 명신이었던 권근(權近)이 편찬한 것으로…
(김정현(金丁鉉),『청도김씨사』,도서출판고산자의후예들,
2003,
pp.34-35.)
아래에
계명(啓明)대학교 한문학과 이종문(李鍾文)교수님의
논문에서 이 일화(逸話)에
대한 내용을 일부 인용한다.
(본홈페이지 [시조의생애와 시세계]의p8,p9참조)
…
金之岱의 면모를 더할 나위 없이 강렬하고 오연한 이미지로 부각시키는 것은 역시
그 당시 崔氏政權의 집정자였던 崔怡의 아들 崔沆과의 사이에 있었던 다음과 같은
逸話이다.
뒤에 全羅道 按察使가 되었다. 중이 된 崔怡의 아들
萬全이 珍島에 있는 어느 절에 머무르고 있었는데, 그 무리들이 橫暴하고 放恣하게
굴었다. 그 가운데서도 通知라는 자가 더욱 더 심했는데, 之岱는 그의 청탁을 죄다
물리치고 시행하지 않았다. 일찍이 그 절에 갔더니 萬全이 거만하게 만나지도 않았다.
之岱가 바로 들어가 堂에 오르니 樂器가 있었으므로 드디어 橫笛으로 몇 曲調를 연주하고
거문고를 잡고 두드리니 그 音節이 悲壯하였다. 萬全이 欣然히 나와서 "마침
사소한 병이 있어서 公이 여기 온 줄 몰랐습니다" 라고 말하고 서로 더불어
즐겁게 마셨는데, 이를 기회 삼아 열 몇 가지 일을 청탁하였다. 之岱가 즉시 시행하고
몇 가지 일을 보류하면서 "行營에 가야 할 수 있는 일이니 通知를 보내주면
같이 살피도록 하겠습니다"라고 했다. 行營으로 돌아온 지 몇 일 뒤에 과연
通知가 찾아오자 之岱가 그를 묶도록 명령하고 그 不法 행위를 하나 하나 헤아린
뒤 강물 속에다 던져버렸다. 萬全은 곧 崔沆인데, 비록 앞의 일로 유감을 품고 있었으나
之岱가 청렴하고 삼가며 이렇다할 허물이 없었기 때문에 끝끝내 헤칠 도리가 없었다.
이
일화는 적어도 두 가지 측면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닐 수 있는 데, 그 가운데 하나는
金之岱의 음악적 소양이다. 보다시피 그는 橫笛과 거문고 등 각종 악기를 연주하여
'悲壯'한 情調를 자아냄으로써 바로 전까지 강렬한 적대감을 가지고 있던 최항의
마음을 일시에 뒤바꾸어 놓을 정도로 음악에 대하여 남다른 조예가 있었던 것이다.
뒤에서 다시 언급하겠지만 金之岱의 이와 같은 음악적 조예는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詩의 世界에도 영향을 미친 흔적이 역력하며, 그의 시에 간헐적으로 모습을 드러내는
豪快한 風流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도 같다.
그러나
이 일화에서 더욱 더 주목되는 것은 역시 부도덕한 권력에 대한 金之岱의 유연하면서도
오연한 대응 방식이다. 물론 시기적으로 이 사건이 일어났을 때는 최충헌의 아들
崔怡가 집정한 시기였고, 그 당시 최항은 아직 萬全이란 法名을 사용하던 승려의
신분에 불과하였다. 그러나 아버지 최이가 국가 권력을 완전히 장악하고 있었으므로
그는 아버지의 권력을 믿고 無所不爲의 횡포를 자행하고 있었고, 따라서 그 당시의
상황에서 최항에 대하여 突兀하게 맞선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국면이었다. 더구나
'당시의 문인지식층들은 최씨 정권의 절대적 지배하에서 수족처럼 움직이는 존재들로서
그 대다수가 표면적으로는 국가의 공적인 관료였지만 실제로는 최씨의 門客에 속하는
私人들이었다. 요컨대 이 시대의 문인들은 동양의 官人 신분에 상응하는 정당한 권리를
소유한 자들이 아니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상황을 고려할 때, 金之岱가 최항의
手足 通知의 죄를 낱낱이 따지고 그를 결연하게 水葬해버린 것은 놀라운 사건이 아닐
수 없다. 더구나 金之岱가 최씨 정권 때 과거에 급제하여 생애의 대부분을 최씨 정권
아래서 관인으로 보냈다는 점을 고려하면 더욱더 그렇다.
아울러
부당한 권력에 대한 결연한 저항에도 불구하고 金之岱에게 이렇다할 허물이 없었기
때문에 최항이 당시에는 물론이고 집권 후에도 그를 어찌하지 못했다는 기록도 대단히
주목되는 부분이다. 왜냐하면 暴壓的 권력에 격렬하게 저항하는 유형의 인물들은
대체로 집권자에 의해 처참하게 꺾이거나, 아니면 오히려 집권자에게 치욕스럽게
무릎을 꿇는 결과로 끝장이 나기가 쉬운 법인데, 金之岱는 참으로 보기 드물게도
이 양 극단을 지혜롭게 극복하고 있기 때문이다. 요컨대 권력의 턱없는 횡포에 대하여
이토록 매섭고 突兀하게 저항하면서도 스스로의 自我의 고고함을 현명하게 지켜낸
경우는 매우 드물다고 할 수 있으며, 이와 같은 점에서도 金之岱는 주목할 만한 인물인
것이다.… (李鍾文,「金之岱의 生涯와 詩世界」(啓明漢文學會,『漢文學硏究』, 제17집, 2003),
pp.31-49.)